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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후변화와 불교
작성자 rlatjrwnd1

기후변화와 불교

이 성 타

(대한 불교 조계종 포교원장

사단법인 대자연환경보존회 회장)

1) 불교인의 이상향 불국토

불교 경전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을 불국토 라고 표현합니다. 불국토는 말 그대로 부처님의 땅입니다.

경전에 묘사되는 불국토는 불교인이 도달해야 하는 가장 이상적인 땅, 꿈 속에서 그리는 이상향입니다. 고통과 환난이 없고, 물질적으로 곤궁하지 않으며, 청정하고 아름다운 환경이 갖추어진 곳입니다. 그 곳에는 괴로움을 받는 중생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러한 불국토가 아닙니다. 경전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 세계 라고 표현합니다. 갈등과 다툼이 있고,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서로를 사랑하기 보다는 서로에게 상처받고 상처를 주는 죄업중생들이 사는 곳입니다.

불국토는 우리 속에 아직 실현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utopia)일 수도 있습니다. 꿈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불국토’에 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를 ‘지향’해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불완전한 중생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부처님을 지향하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고통이 가득한 예토에서 부처님의 땅 불국토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모든 문화는 바로 부처님 세상을 실현하자는 정신에서 출발합니다. 사찰의 각종 건축물, 그림과 조각, 무형으로 전해지는 각종 의식 모두는 장엄한 부처님의 세상을 이 사바세계에 재현하는 의지적 표현입니다. 일주문, 해탈문을 지나 대웅전을 향해 가는 한국의 전통사찰 구조는 사바세계를 벗어나 부처님의 영역에 드는 것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인 경주 불국사에는 이런 정신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부처님의 나라, 부처님의 절입니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의 세상을 불국사라는 절을 통해 구체화,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불국사에 가면 부처님의 세상, 신라인의 염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현되는 부처님의 세상은 이 세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찰은 주변 환경과 어울려 조화되고 이 세상과 어울려 함께 조화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 세상을 떠나서는 부처님의 세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바 세계에 부처님의 세상을 실현하는 불교인의 실천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그것이 환경이라는 화두입니다.

2)환경은 우리 시대의 화두입니다

불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다가오는 21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환경입니다.

물론 지금도 환경은 중요한 화두입니다. 하지만 아직 환경의 가치를 모든 인류와 국가가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환경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을 피상적으로만 알뿐 절실한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직도 저개발 국가에서는 환경보다는 개발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환경변화는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저의 한국에서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지구온난화, 기상이변을 몇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팬더곰 아시죠, 어린이들은 팬더곰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덩치는 크지만 마치 아기같습니다. 동물원마다 기르고자 합니다. 그런데 식성이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대나무 잎만 먹습니다. 그래서 기르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놀이공원인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 식물원은 중국에서 팬더곰을 도입한 후 먹이로 쓰기 위해 1994年 왕대나무 1백그루를 실험적으로 심었습니다. 왕대나무는 따뜻한 곳에만 자라기 때문에 한 해 잎을 먹이고 겨울에 대나무가 얼어 죽으면 다음해에 또 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북위 36도를 한계로 한다던 왕대나무가 북위 38도 가까운 용인에서도 얼어죽지 않고 무성하게 자라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도 옮겨심은 그해만이 아니라 계속 잘 자라고 있습니다.

식물원은 매년 왕대나무를 옮겨 심는 번거로움이 없어져서 좋겠지만, 이 일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후변화가 한반도의 겨울을 따뜻한 겨울로 만들어 버려서 왕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 한참 위로 이동해 버렸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상전문가는 앞으로 30年쯤 지나면 한국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로 변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합니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한 겨울 한강은 꽁꽁 얼어붙어 아이들이 썰매를 지치고 어른들은 구멍을 뚫고 낚시를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한강에서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요? 오염되고 더워진 강물은 겨울에도 여전히 얼지 않고 흘러갑니다.

한국은 지난 1백년 동안 기온이 1. 4도나 높아졌습니다. 최근 십여연간 겨울철 평균기온이 예년의 평년기온을 휠씬 웃돌아 2000연대 중반이 되면 연평균 기온이 2~4도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기술처 한반도기후변화보고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이런 변화는 과연 괜찮은 것일까요?

불행히도 이런 변화가 인류의 생존조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기후가 변화하면 그에 맞추어 식생이 변화합니다. 식생이 변하면 이에 따라 생태변화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적응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만일 적응 속도룰 뛰어넘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인류의 대재앙이 된다는 데 고민이 있습니다.

3) 기후변화는 인재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1971연도에 발간된 로마클럽의 보고서 때문입니다. 로마클럽 보고서가 처음 기획될 때는 사실 미래에 대한 낙관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한 생산력의 발달은 인류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인류는 더 이상 그와 같이 어리석은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되었습니다.

로마클럽은 바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런 낙관론을 바탕으로 우리의 미래 모습을 조명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미래는 과연 장미 빛 이었을까요?

보고서는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했습니다. 우리 인류가 현재와 같은 생활을 유지하는 한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주요 에너지자원, 석탄과 석유는 불과 몇 백년밖에 지탱하지 못합니다. 농업생산력은 인류의 인구 증가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현대인이 배출하는 쓰레기는 자연의 정화능력을 넘어서서 먹을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로마클럽의 보고서를 통해서 확인한 것은 전 세계적인 환경재앙, 인류의 위기인 것입니다.

최근 1백년동안 지구의 평균 지표온도는 섭씨 0.5도 상승했습니다. 지난 2만년동안 지표온도가 모두 섭씨 4도 상승한 것에 비하면 금세기의 온도 상승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미국 알래스카의 남동부에 위치한 베링빙하는 금세기에만 면적이 1백30㎢나 줄어들었습니다.

이유는 화석 연료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가 거대한 온실처럼 지구를 감싸 지구 온도를 상승시키기 때문입니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등 이른바 온실기체의 배출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지구의 기상은 격변하고 있습니다. 이들 온실가스는 지표에서 우주로 방출되는 복사열을 흡수하여 차단하므로 마치 온실의 유리창처럼 지표의 열을 외부로 방출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화석연료의 사용이 늘어갈수록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높아지고 이 온실 효과는 더욱 커질 전망입니다.

우리가 쓰는 난방연료, 취사용 가스, 자동차 연료, 화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석탄과 석유, 이 모두가 화석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얻습니다. 즉 이들의 사용이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키고 기상이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세계적인 기상이변을 불러일으키는 엘니뇨 현상도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폭설은 물론 엄청난 장마와 극심한 가뭄이 지구 곳곳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1997연에는 미대륙쪽으로 가야 할 허리케인이 한반도 쪽으로 올 정도였습니다. 엘리뇨로 인한 태평양의 온수대가 기후환경을 이처럼 헝클어 놓은 것입니다.

앞으로 1백년 뒤에는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내리고 방대한 지역이 물에 잠기는 한편 사막이 늘어나고 아사하는 사람도 생기게 될 것이라고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위원회’(IPCC) 실무팀이 경고한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초래되고 있는 기후변화의 인과관계는 단순하고도 명확합니다.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양식이 초래한 인위적인 변화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인간의 욕망을 무한히 충족하고자 하는 현대의 물질문명이 초래한 변화입니다. 에너지와 자원의 무한 소비가 초래한 필연적인 재앙입니다.

이런 기후변화를 바로 잡으려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갑니다.

1995연의 발표에 의하면 90년 수준으로 배기가스 수준을 안정화하는 데에만 2천4백 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는 한편 90년 수준 이하로 낮추기 위해서는 국내총생산(GDP)의 5~6% 정도가 들어야 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합니다.

또 많은 환경관계자들은 대기 중에 계속 방출되면서 지구 온난화 등 기후변화까지 야기해온 상당량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데는 1백년이 걸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환경재앙을 일으킨 것은 요즈음만은 아닙니다. 이미 수 천 년 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리비아사막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지역은 원래 사막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막이 된 것은 피라미드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운반하고 배를 만들기 위해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나무를 베어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군함 1척을 만드는데 큰 나무 1천 그루가 들어갔다고 계산됩니다. 비를 저장할 숲이 없어지자 그곳은 급격하게 사막화가 진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는 사막이 형성된 것입니다.

수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점이 있습니까? 방식만 다를 뿐 우리가 건설한 문명을 사막으로 만드는 자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4) 멸종의 시대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생물체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줄잡아 1천 만 종에서 8천만 종으로 껑충 뛰기도 하고 3천 만종으로 줄여 잡기도 합니다. 파악된 생물체는 1백60만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숲을 파괴하면서 수목뿐이 아니고 숲에 살던 이들 생물체도 씨를 말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선 20년 전 부터 멸종위기를 맞은 동식물 9백12종을 골라 보호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 흔하던 두꺼비, 반딧불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도 5년 전부터 1백79종을 골라 보호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 멸종을 막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노력입니다.

해마다 인구는 약 1억 명씩 늘고 동식물은 2만5천~5만종 가량이 멸종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현재 살고 있는 생물 종의 25%정도가 30년 이내에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매년 16만 평방 Km의 열대림이 사라지고 육지면적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지역이 사막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해상사고 등으로 한해 동안 바다에 쏟아지는 기름은 약60만t에 달합니다. 이 기름 층은 태양광선의 90% 정도를 차단하여 해양 생물의 먹이가 되는 플랑크톤이 살 수 없게 만듭니다. 새들은 누출된 기름에 깃털이 젖어 날지 못하고 굶어죽게 됩니다.

지난 1세기 동안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25% 증가했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약46억 년. 이를 46시간으로 가정하면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것은 불과 6시간 전이고 산업혁명은 1분전에 시작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60초 동안 인류는 지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왔습니다.

지구가 입은 상처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바로 가해자인 인류에게 되돌아옵니다. 사막화 현상으로 경작지를 상실한 사람들이 물을 찾아 끝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바로 환경난민입니다.

미국 기후연구소는 지구촌의 환경난민이 2천5백 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동. 서부 아프리카와 중국이 거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여기에 정치 경제난민까지 합치면 난민수는 거의 남한 인구보다 많은 5천만을 넘게 됩니다. 이제 생물체는 멸종의 시대, 사람은 난민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할 수 만 은 없는 상황입니다.

모두 우리 인류의 잘못입니다.

5) 현재에 대한 성찰이 필요

물질적 풍요를 향한 인류의 욕망은 산업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생태계를 마구 파괴하여 왔습니다. 그 결과 지구상에 오래 오래 살아오던 여러 가지 생물들은 이미 수없이 멸종됐거나 또는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더구나 핵폭탄 같은 살인무기를 무분별하게 개발하고 핵폐기물을 함부로 버려 마침내 인간 자체의 생존은 물론 지구 자체의 종말을 걱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도취되어 부작용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류가 앞으로도 번영과 행복을 구가할 수 있을까요?

눈과 귀가 있고 그리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하늘도 병들고 땅도 병들고 산도 물도 나무도 풀도 모두 병들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이렇듯 자연을 파괴하고 마침내 자기들 자신마저도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을까요?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잘못되어도 아주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산업과 개발의 이름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자연 파괴를 막지 않는다면 자연과의 공생은 불가능하고 우리의 행복한 미래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환경문제 앞에서도 여전히 물질중심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오염된 강물도 맑게 할 수 있고 혼탁해진 공기도 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산만 확보되면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환경 오염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몇 몇 국가들의 전례를 증거로 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계속 널리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용’과 ‘기술’의 문제로 환경을 생각하는 한 환경은 더욱더 악화될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금 자신이 비용을 지불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술적 대안을 준비하는 동안 환경은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에 박힌 병의 근원은 도외시 한 채 증상의 완화, 겉포장만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골수에 박힌 병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뼈아픈 자기 반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6) 인연의 환경 관으로 기후 변화를 극복하여야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서 존재합니다. 그것이 불교의 인연법 입니다. 환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생존은 바로 남의 존재, 내가 생존하는 환경을 전제로 할 때에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입니다. 남이 없으면 나 또한 없다는 것이 불교 환경 관의 핵심 내용입니다.

불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나타내는 ‘인과’, ‘업’ 등의 단어는 바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뜻입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의 현재는 우리와 우리 이전의 모두가 뿌린 결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뿌리는 인과의 씨앗에 따라 그에 합당한 결과를 맺게 됩니다.

환경문제는 짓는 자와 받는 자가 동일한 공업입니다. 내가 버리는 오염물질은 직접적으로 나의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문제는 외면도 있을 수 없고, 잘못될 경우 모두가 피해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구 사상은 보통 동물만을 생명체로 보는데 비해 불교는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이라고 일컫는 무정물 까지 모두 생명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든 생명이 서로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다른 중생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중생은 우리를 먹습니다. 우리가 내뱉는 이산화탄소는 식물이 먹고, 우리의 배설물은 식물의 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순환체계 속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현대 산업문명이 가져온 생태계 파괴, 환경 오염은 이러한 순환체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는 속도는 자연이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습니다. 현대 인류는 자원을 고갈시킬 뿐 아니라, 자연의 정화능력을 넘어서는 엄청난 쓰레기와 공해물질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의 생활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말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해결을 위한 실천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자연을 오로지 정복(?)하고 채취 약탈하는 ‘대상’으로 보는 서구적 가치관으로는 환경 문제가 해결되지 못합니다. 보다 많은 소비가 미덕인 생활방식이 지속되는 한 환경은 지속적으로 파괴될 뿐입니다. 탐욕적인 경제활동이 지속되는 한 필연적으로 자연파괴와 인간소외, 전쟁과 폭력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만이 생존의 절대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 아니 돌멩이 하나까지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엄숙한 생명의 권리를 지닙니다. 그 권리를 우리 인간이 무시하고 해치는 것은 결국 우리 생명의 조건을 스스로 말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곤충도 살 수 없고 동물도 살 수 없는 지구라면 인간 또한 병들어 멸종될 것입니다. 그를 막는 일은 오로지 환경을 제일의 화두로 삼아 인류의 생활 방식을 스스로 바꾸는 일 뿐입니다.

7) 부처님의 가르침

생명의 존중과 생명에 대한 무한자비는 불교의 근간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생명이 처한 위기, 환경문제에 적극 대처하여 올바른 해결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승심지관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보살은 마땅히 자비심으로 십방의 인민 및 날벌레, 길 벌레의 무리에 이르기 까지도 어여삐 생각하여 갓난 아기와 같이 보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고

일체의 농작물과 화, 초목의 숲 등을 태우거나 파괴하지 말고 물을 빼거나 대지 말고 자르고 베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에는 다같이 생명을 가진 짐승과 벌레들이 있으므로 그 죄 없는 중생들을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괴롭혀선 안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불교적 삶, 불교적 수행은 바로 이런 의식의 실천입니다. 자비의 대상을 살아있는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이 비 생명체까지도 그 범주에 포용합니다. 중생을 희생 시키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에 나오는 각종 이야기가 그런 내용이며, 인격으로 형상화될 때 불교도는 그를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스님들이 지켜야 하는 <<사분율>>에 “땅을 파지 말라, 살아 있는 나무를 꺽지 말라, 고의로 축생의 목숨을 뺏지 말라, 벌레있는 물은 마시지 말라”고 계목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열반경>>에는 “무정물에도 불성이 있다”고 중생의 은혜와 자연환경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사고의 행태와 삶의 방식을 전환하여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과거 삶의 방식에 대한 진정한 참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제법집요경>> 에 이르기를

설사 백천겁 동안을 욕심에 집착해도 만족할 이 없도다. 항상 욕심의 경계를 구하거니 어디에 즐거운 곳이 있으리요. 만일에 욕심에 뜻을 지으면 잠시에 자라고 늘어나지만 모든 하늘과 세상사람들 이것으로 인하여 타락하는 것이다

또한 “저 어리석은 범부들은 항상 욕심을 탐내나니 처음에는 조그만 즐거움이 있으나 뒤에는 반드시 손해가 있으리. 따라서 이 욕심의 경계는 무상하여서 결정코 장래에는 흩어지리니 지혜를 갖춘 모든 사람은 욕심에 대하여 어지럽지 말아라” 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이처럼 절약과 청빈, 욕망의 절제와 정신적 삶에 대한 가치를 높이 부여하고 수행적 삶을 영위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초기 교단의 수행승들은 시림(施林)에 버려진 누더기를 기워 입고 다녔습니다. 이는 유정물의 재활용을 통해 생명을 보호하는 대자대비의 극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음식물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발우 공양은 생명공동체인 신성한 대지를 자연 그대로 보호하는 깊은 통찰위에서 나온 환경 윤리적 실천인 것입니다.

8) 불살생의 계율 정신으로

불교는 원래 공생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공생의 원리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 사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대기 오염을 비롯한 가지가지의 오염과 오존층 파괴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연파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고통과 파괴의 악순환입니다. 중생세간의 윤회의 사슬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한채 새로운 괴로움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윤회의 길을 해탈의 길로 전환하는 길 뿐 입니다. 바로 공생의 원리입니다.

중생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구촌의 절대 윤리입니다. 우리의 정말 무서운 적은 우리 속에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이 잘못된 가치관은 지금 만천하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기적인 나 자신의 단기적, 욕망적 쾌락을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 다른 존재의 가치는 부정되어도 좋다는 왜곡된 가치관입니다.

이 잘못된 가치관, 전도 몽상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다면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일찍이 우주전체를 연기법에 의한 하나의 생명현상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삶을 추구해 가는 것이 8정도입니다. 우주만물은 하나와 일체가 서로 중중무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환경 윤리는 생태학적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 인간 우월 주의로 포장된 이기주의를 부정하고, 범 생명주의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동체대비정신의 구현입니다.

물질만능, 대량소비의 산업화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며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연기관에 입각해 중도․무아사상이 이제 보편적 사회가치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일체만물이 동근(同根)인 생명의 법칙을 깨닫고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깨끗하다고 하였습니다.

<<유마경>>에서는 ‘중생의 잘못으로 여래의 정토가 얼마나 엄정한지를 볼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은 본래 깨끗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면 곧 이땅의 공덕장엄을 보게 되리라’ 하셨고, ‘맑고 깨끗한 불국토를 원하거든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히 하라. 마음이 맑고 깨끗해 짐에 따라 불국토는 깨끗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청정 국토청정을 구현하고 극락정토를 건설하는 길입니다.

앞서 되풀이해서 말씀드렸듯이 기후환경의 변화는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를 일삼는 인간의 탐욕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수행과 수양을 쌓지 않으면 생태계 문제나 환경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이상적 세계인 불국토를 실현하고, 탐욕과 경쟁의 가치가 아니라 상호 존중과 살생을 이룩할 수 있는 정신과 실천의 길을 열어갈 때 인류가 당면한 환경변화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연파괴의 시대에 환경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바로 불제자로서 생명존중을 실천하는 기본적 의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계율의 첫 번째인 불살생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할 때 진정 ‘이웃집 토토루’의 자연 친화적 삶이 만화 속만이 아닌 우리 삶 속에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